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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NOW

독일-북한 이산부부 43년,

마침내 상봉시킨 독일특파원의 분투기

글ㆍ사진 실습기자 정은우(si1verain_@naver.com)

10여 년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러브스토리가 있었다. 독일 여성 레나테 홍과 북한 유학생 홍옥근 부부의 45년 만의 상봉 장면이었다. 감동적인 휴머니즘 스토리는 곧 큰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휴머니즘’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결말에 이르기까지, 그 뒤엔 2년여 간의 보이지 않는 분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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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강 중인 유권하 교수

“이제부터 제가 말할 건 사실 러브스토리예요. 러브스토리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 이 이야기 뒤엔 보이지 않는 상당한 물 밑 노력이 있었습니다.”

 

유권하 전북대 초빙교수는 서울대학교 미래뉴스실습 특강을 찾았다. 그는 중앙일보 독일특파원 시절 발굴했던 한 기사와 이어진 후속보도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2006년 11월 14일 첫 보도부터 2008년 7월 25일 상봉까지. 유권하는 이산가족 ‘레나테 홍 이야기’의 발굴부터 상봉까지의 전 과정을 ‘분투’였다 말한다.

독일 통일 16주년 기사를 준비하던 유권하 당시 중앙일보 특파원은 흥미로운 스토리 하나를 듣게 된다. 독일 예나(Jena) 시의 한 할머니가 북한 출신 남편을 찾는다는 것이다. 독일•북한에도 이산가족이 있다는 얘기, “이거다!” 분명 흥미로운 기삿거리였다. 그는 바로 할머니를 찾았다.

 

 사연 속 할머니가 바로 레나테 홍 (Renate Hong). 1955년 독일 예나 시로 온 북한유학생 홍옥근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1961년 북한대사관으로부터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 후 43년이 흘렀고, 그 세월 동안 그녀는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남편 찾기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이 사연을 담은 첫 기사가 바로 2006년 중앙일보 1면의 ‘43년째 수취인 불명’이다. 기사는 당시 대중의 가슴에 작은 파문을 남겼으나, 사실 여느 휴먼스토리 기사처럼 잊히는 운명을 맞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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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14일 중앙일보 첫 기사. 레나테 홍의 사연에 초점을 맞췄다.

▲ 레나테 홍 할머니의 사연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위 버튼을 클릭하세요.

레네타 홍 부부 이산기, 중앙일보의 첫 보도

하지만 당시 독일특파원이었던 유 교수는 레나테 홍 할머니가 취재에 동의한 최초의 목적, ‘상봉’이 성사되기 전에는 기사를 끝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는 ‘상봉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남편 홍옥근의 생사 확인, 편지 수신, 두 사람의 만남으로 뻗어 나가는 프로젝트였다. 타깃 독자층도 세 단계로 설정한다. 1단계로 사건 당사국인 한국과 독일에서 화제가 되고, 2단계로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으로 퍼져, 3단계 국제적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선 국내외의 여론을 끌어내야 했다. ‘이데올로기로 개인의 권리가 빼앗겼기에, 이제라도 국제 사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논리를 세웠다.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레나테 홍 할머니의 사연은 잊히지 않아야 했다. 이를 위해 보도는 계속되어야 했고, 사건엔 진전이 필요했다.

 

그는 적십자사와 UN의 도움을 얻어 독일 외무성과 북한 대사관으로부터 반응을 얻어내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세운다. 해외 협력을 향후 보도의 ’키‘로 잡은 것이다.

▲ 당시 설정한 프로젝트 계획. 플롯과 스토리라인을 정하며 목표를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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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설정한 톤앤매너. ’휴머니즘‘과 ’인권‘, ’이데올로기 초월‘ 등의 가치를 핵심으로 한 보도가 이뤄졌다.

독일 적십자사의 냉담한 반응을 딛고

유 기자는 우선 레나테 홍 할머니에게 청원서(친필 편지)를 독일 적십자사 등에 보내보라고 조언했다. 할머니는 독일 적십자사, 주독 북한대사관과 독일 외무성에 청원서를 보냈다. 유 교수는 이 청원서의 행방을 쫓아 해당 기관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독일적십자사 담당자는 “이런 비슷한 사연은 수없이 온다, 이 사연이라고 특별할 것도, 특별히 도울 수 있는 것도 없다”고 답했다. 이에 그가 “말씀하신 내용 인용해도 되겠냐”는 질문을 던지고, 담당자는 이를 거부하며 잠시 기다릴 것을 요구했다.

 

얼마 후 적십자사는 “홍옥근은 이미 결혼했고, 만남을 원치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홍옥근은 살아 있다. 살아있으니 상봉할 수 있다.’ 이제 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독일 언론과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중앙일보 첫 보도 당시 이 내용을 전달했던 DPA(Deutsche Presse-Agentur) 통신 기사에 독일 현지의 반응을 꽤 있었다는 점에서, 독일 언론도 관심을 가질 만한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알고 지내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FAZ)과 쥐트도이체 차이퉁(Süddeutsche Zeitung, SZ) 의 기자에게 레나테 홍 이야기를 적극 알린다.

 

그렇게 할머니의 사연은 독일 현지의 주요 일간지에 소개됐고, 현지 메이저 방송국들도 취재하면서, 독일 정부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결정적 한 방, 반기문 UN 총장 당선자 방독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독일 현지 여론은 긍정적으로 흘렀으나, 한국에서의 관심 환기가 더는 어렵다고 느꼈을 시점이었다.

 

때마침 ‘한 방’이 찾아온다. 2007년도 2월 당시 차기 UN사무총장으로 선출된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이 독일을 방문했다. 유 교수는 기자회견에 찾아갔고, 질의 시간에 ‘보편적 인류 문제’로서의 레나테 홍 이야기를 전하며 UN의 입장 표명을 부탁한다.

 

반 전 총장은 이에 대해 “국제 사회의 도움을 통해 해결돼야 할 사안”이라며 “해당 문제를 논의하고, 이산가족의 상봉 노력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그렇게 레나테 홍 이산 부부의 문제는 UN의 협력을 약속받는다.

 

2007 남북정상회담도 열렸다. 당시 정상회담 프레스센터는 ‘기삿거리’를 찾는 외국 특파원들로 가득했다. 유 교수는 정상회담이야말로 레나타 홍 사연이 국제적으로 퍼질 수 있는 장이라 생각했다.

 

그는 레나테 홍 할머니에게 방한을 권한다. 서울에 온 할머니는 남산의 대한적십자사 화상 상봉장에 방문해 기존 남북 이산가족과 만났고, 이 장면은 사진 뉴스로 각 매체에 보도됐다. 이를 계기로 세계 언론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고, 한국과 독일 양국 정부가 적극 나서며 결국 그녀의 방북길이 열리기에 이른다.

 

세계인의 눈길을 끌었던 독일여성과 북한유학생 부부의 45년 만의 상봉은 이렇게 성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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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나테 홍 프로젝트 실제 진행 과정.

개인의 이야기가 곧 사회를 말한다

2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는 이렇듯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유 교수는 “레나테 홍 프로젝트는 운이 좋아서 성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운’은 때마침 ‘국제적 협력’을 끌어낼 수 있는 각종 이벤트가 열렸다는 것이었다.

 

휴머니즘 스토리는 강하다. 그러나 감동적 스토리 자체만으로 원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는 없다. ‘레나테 홍 프로젝트’는 그 방증이다. 한 사람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전 세계가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일을 성사하는 과정에는 누군가의 오랜 헌신과 분투가 필요하다. 유권하 교수는 그런 분투의 사례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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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하

중앙일보에서 국제 관련 기자 생활을 했다. 중앙일보 독일 특파원, 중앙데일리 대표이사, 한국외국어신문협회 회장, 등등을 거쳐 현재는 주한 헝가리 명예 영사. 외교부 정책 자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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