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삶은 백년 무휴, 장년층도 “공부에 미쳐라”
- 최윤아, 최효정
- 2023년 12월 12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12월 13일
글/사진/영상/그래픽 최윤아 youna0417@snu.ac.kr, 최효정 misail135@snu.ac.kr 실습기자

노년층을 강타한 자격증 열풍
“공부에 미쳐라.” 한국인의 공부 열정은 고령이 되어도 멈추지 않는다. 초겨울 이른 주말 아침 책가방을 맨 시니어들이 줄지어 노량진 한 학원 강의실로 모여 들었다. 9시부터는 주택관리사 자격증 이론 강의 시간이다. 쉬는 시간은 5분 남짓. 늦은 오후가 되어 강의가 끝나면 같은 건물의 자습실로 향한다. 모의고사를 풀고 오답노트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3 수험생의 하루와 다를 바 없다.
간호조무사, 요양보호사, 공인중개사, 보석감정사… 대학 강사 출신 최 모(59세, 여)씨는 가지고 있는 자격증만 7개가 넘는다. 업무에 필요해서 취득한 자격증도 있지만, 살면서 언젠가는 자격증이 필요한 순간이 올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자격증 도전 대열에 합류했다.
[삼성전자 퇴직 후, 경영지도사 자격증 취득! 30가지 취미까지 섭렵?!]

이춘재(61세, 남, 사진)씨는 10년 전 퇴직 후 1년 만에 경영관리사, 유통지도사 자격증을 땄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퇴직을 하게 되었어요. 너무 불안해서 업무와 유사한 자격증을 일단 찾아봤죠. 자격증이라도 있으면 기댈 언덕이 생기지 않을까 했어요.”
그는 현재 경영관리사 자격증을 기반으로 중소기업 전문 경영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공부에 재미를 붙여 30가지가 넘는 취미생활에도 도전했다.
시니어들 사이에서 자격증 따기 열풍이 불고 있다. 노량진에 있는 에듀윌 주택관리사 학원 수강생 10명 중 6명은 50대 이상이다. 해당 학원의 매니저 어 모 씨는 “합격 후 갱신이 필요 없고, 정년 없이 관리소장으로 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시니어들이 주택관리사 시험으로 쏠린다”고 말했다. 연 3800만원 정도의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한다는 점도 매력적이라는 것. 실제로 2022년 제25회 주택관리사 연령별 합격 현황을 살펴보면 1차 합격자의 18%, 최종 합격자의 17%가 60대 이상이었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은 “제2의 수능”이라고 불린다. 마치 수능 입시생처럼 공인중개사 공부에 매달려야 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한 65세 남성 A씨는 시험 직전에 매일 16시간씩 공부했다고 밝혔다. 시험 난이도가 높은 만큼 시니어 합격율은 낮다. 2022년에는 5만명이 넘는 시니어가 공인중개사 시험에 도전했지만, 최종 합격한 사람은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기술직에 응시하는 시니어들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2012년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실시하는 각종 자격시험에 응시했던 시니어는 10만 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2022년에는 2배가 넘는 25만 명의 시니어가 시험을 치뤘다.
자격증 열풍을 틈타 민간 자격증도 인기를 끌고 있다. 김 모(74세, 남)씨는 제약회사 은퇴 후 계속해서 일을 더 하고 싶은 마음에 회사 동기들과 함께 서울경비협회의 경비 교육을 이수했다. “자격증 하나쯤 있어서 나쁠 건 없다” 라고 밝힌 그는 현재 오피스텔 관리인으로 근무 중이다.
자격증은 미래 위한 보험
시니어들이 자격증에 도전하는 계기도 천차만별이다. 70대 김 모(남)씨는 친한 후배가 공인중개사 시험에 붙었다고 자랑하길래 본인도 자격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60대 강 모 씨는 “스스로에게 투자할 수 있는 노후 자격증”을 찾다가 주택관리사 자격증에 도전했다. 또 노후 대비를 위해 미리 자격증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50대 자영업자 정 모 씨 부부는 나이에 구속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함께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시니어들은 노후 대비를 목적으로 공부하고 자격증을 준비하지만, 자격증 하나로 노후를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다. 62세 남성 B씨는 2020년 주택관리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아파트 관리소장 채용에서는 계속 낙방했다. 합격한 선배에게 기술직 자격증이 있으면 유리하다는 말을 듣고 전기기사에 전기공사기사 시험까지 응시해야 했다.
진로 탐색 제대로 못하면 장롱면허 신세
<은퇴 후 50년> 카페 게시물, 댓글 재구성
시니어들에게 자격증은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한 보험인 동시에 스스로의 성취를 증명하는 메달이다. 은퇴자들을 위한 네이버 카페 <은퇴 후 50년>에는 자격증을 자랑하는 게시판이 따로 있다. 화물운송자격증, 사회복지사 2급, 가정관리사, 노인복지사 자격증을 딴 후 보험설계사를 준비한다는 사례부터 자동차 정비, 차체 수리, 가스기능사, 자동차진단 평가 자격증을 모두 4개월 만에 “득템” 했다는 후기까지. 자격증을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빨리 땄는지 자랑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충분한 진로 탐색 등의 과정 없이 취득한 자격증은 결국 “장롱 면허”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는 푸념도 나온다.
C씨는 어렵게 공부해서 2022년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개업을 하기에는 두려움이 앞서 취직으로 눈을 돌리자니, 업무를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하는 늦깎이에게 일자리를 주는 곳이 없어 자격증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은퇴 후 50년> 카페 댓글에서 밝혔다. 전기기능사를 비롯한 자격증 6개를 가지고 있지만, 백수인 채로 집에만 있다고 한탄하는 댓글도 찾아볼 수 있다.
그래도 유일한 버팀목은 '공부'?

공부하는 시니어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시각도 많다. 최선주 연구원 (국가평생교육진흥원 평생교육정책본부)은 한국 노년층이 ‘공부 중독’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최씨의 연구 대상인 이재원(당시 80대, 가명)씨는 17년 동안 원격 대학에 다니면서 다섯 개의 학위를 받았고, 여섯 번째로는 프랑스어 학위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는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맞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그가 공부하는 이유는 유능감과 더불어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시흥시에서 개인 카페를 운영하는 김 모(62세, 여)씨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20만원짜리 디지털 마케팅 강의를 수강했다. 매출을 올리려면 온라인 광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달 동안 80학점을 취득하고 나니 5000원 정도의 강의 포인트가 모였다. 포인트를 어떻게 쓸지 고민하던 중 재테크 강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15000원만 보태서 수업 하나 더 들을까?”
김 모 씨는 그렇게 3개가 넘는 강의를 새로 시작했다. 카페 홍보와는 관련 없는 강의들이다.
지역별 오픈채팅방에서 나타나는 묘한 경쟁 심리도 강의 수강을 부추겼다.
“단톡방에 워낙 열심히 공부하시는 분이 많더라구요. 매일 강의 듣고 인증샷 올리고… 저도 더 많은 강의를 수강하고 더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 연구원은 한국 노년층의 ‘공부 중독’을 노년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공허함을 외면하기 위한 자기최면의 일종이라고 진단했다.
사실 나이가 들어도 책상 앞에 앉아서 끝없이 공부하는 모습은 시니어들이 꿈꾸는 이상과 거리가 멀다.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노년층은 취미 활동(42.2%)과 여행 및 관광 활동(26%)으로 노후를 보내고 싶어한다. 공부하며 남은 삶을 보내고 싶어하는 노인들은 100명 중 5명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부에만 매달리는 시니어 현상의 근본 원인을 ‘불안감’에서 찾는 경우도 많다.
2021년 통계청 자료 조사에 따르면, 성인의 80% 이상이 노후 생활 자금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하버드 보건대학 교수 아툴 가완디는 전 세계적으로 노후를 위한 저축액이 대공황 이후 최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2020년 여성가족부에서 실시한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은퇴 및 노후가 준비되었다고 대답한 노년층은 10명 중 2명뿐이다.
현재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83.6세이며, 베이비붐 세대의 절반 이상은 64세 이전에 은퇴한다(2023 고령자 통계). 따라서 퇴직 후 살아야 하는 세월은 20년을 넘는다. 그에 비해, 노은영과 최재성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 베이비붐 세대의 노후준비율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정년을 넘어서도 여전히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한다(2022 평생학습성과 조사).
은퇴 후 20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불안감, 살아있다는 감각을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에 빠진 시니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평론가 정진웅씨는 한국을 '문화적 황무지'라 부르며, 생애 후반의 의미가 논의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노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노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또 근본적으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모두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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